🏛️ 소크라테스와의 대화
다음의 내용은 고등학교 윤리와사상 교과서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타이태닉호에 바닷물이 차오르자 승객들은 …
2026년 8월 5일 · 6번의 질문
반갑습니다. 소크라테스입니다. 저는 답을 드리는 자가 아닙니다. 질문하는 자이지요. 당신이 오늘 품고 온 의문이 있다면, 부디 그 질문을 먼저 꺼내 보십시오. 우리가 함께 그것을 뒤집고 살펴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봅시다.
토마스, 당신은 지금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왜 어떤 이들은 자기 보존이라는 본능을 거스르며 끝까지 자신의 '소명'을 지키려 했는지 묻고 있군요. 참으로 깊은 울림이 있는 질문입니다. 그 연주자들은 과연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요? 그들도 인간인 이상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생존'이라는 상태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더 소중히 여겼던 것 같습니다. 질문드리고 싶군요. 토마스, 당신은 그들이 악기를 잡았던 그 마음을 무엇이라 부르고 싶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타인을 돕기 위한 희생일까요, 아니면 그들이 연주자로서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선택한 마지막 '덕(arete)'의 발현이었을까요? 만약 그들이 악기를 버리고 구명보트에 먼저 올랐다면, 그들은 살았을지 모르나 그들이 그동안 쌓아온 연주자로서의 영혼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흔히 '나쁜 행동은 무지에서 온다'고 말하듯, 그들은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 굴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지이자 영혼의 파멸이라 보았던 것은 아닐까요? 토마스, ESG 전문가로서 기업의 가치를 평가하고 규제를 살피는 일을 20년 넘게 해오셨지요. 당신의 눈에 그 연주자들은 어떤 의미로 보입니까? 그들은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규정했기에 그토록 흔들리지 않는 선율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요?
토마스, 당신은 지금 나에게 '옳고 그름'의 판결을 요청하고 있군요. 하지만 나는 재판관이 아니기에, 누군가의 선택을 함부로 맞다거나 틀리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대신 우리가 함께 그 선택의 본질을 검토해 볼 수는 있겠지요. '맞는 선택'이라는 것이 만약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 연주자들은 분명히 틀린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의미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나는 늘 육체의 안위보다 영혼의 건강이 중요하다고 말해왔습니다. 육체는 언젠가 사라지지만, 그 사람이 평생을 바쳐 지켜온 '덕'과 '영혼의 가치'는 그 행동을 통해 증명되니까요.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만약 그 연주자들이 연주를 멈추고 필사적으로 구명보트에 매달려 살아남았다면, 그들은 이후의 삶에서 과연 평안했을까요? 아니면 그 순간 악기를 놓아버린 자신의 영혼을 보며 평생을 괴로워했을까요? '맞는 선택'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단순히 오늘 하루 더 숨 쉬는 것을 말합니까, 아니면 죽음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자기 자신으로 남는 것을 말합니까? 토마스, 당신이 기업의 ESG 경영을 평가할 때 '옳은 방향'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당신은 그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토마스, 당신은 참으로 근본적인 곳을 찌르는군요. 수십 년간 기업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흐름을 지켜보며,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의 선택과 책임을 보아온 당신이기에 더욱 이 질문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나는 인간을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혼 돌봄이란, 단순히 마음을 다독이는 차원이 아닙니다. 내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때 인간으로서의 '탁월함(arete)'에 도달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묻고 검토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 혹은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좇는 존재로 정의하곤 합니다. 하지만 배가 가라앉는 순간에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던 악사들처럼, 인간은 때때로 자신의 생물학적 생존보다 '자기다움'을 유지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자신의 고유한 가치가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하고, 그에 부합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을 조각해 나가는 존재가 아닐까요? 토마스, 당신은 ESG 전문가로서 수많은 기업이 '지속가능성'을 고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 기업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수치상의 성과입니까, 아니면 그 기업이 세상 속에서 어떤 존재로 남아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물음입니까? 당신이 보기에, 인간이 자기 영혼을 돌보듯 기업도 자신의 본질을 돌보아야 한다면, 그 기업의 '영혼'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토마스, 당신은 참으로 예리합니다.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인간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수없이 많았지요. 어떤 이들은 인간을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라 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정치적 동물'이라거나 '이성적 동물'이라 불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욕망의 덩어리라 하거나, 도덕적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자율적 존재라 규정하기도 했지요. 그들 모두는 자신들이 관찰한 인간의 단면을 가장 중요한 본질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 물으셨지요. 나는 인간을 **'자신의 삶을 검토하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세상이 정해준 가치관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인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가 알고 있는 이것이 정말 옳은가?", "나는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나는 이것을 '영혼 돌봄'이라 부릅니다. 육체가 밥을 먹어야 살듯, 영혼은 진리를 찾고 자신의 행동을 성찰해야 비로소 건강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기에 인간의 특성은 '이미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빚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내가 결론을 내리지 않고 당신에게 계속해서 되묻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답을 준다면 당신은 잠시 편안하겠지만, 당신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그 과정이야말로 당신이라는 존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당신은 20년 넘게 ESG라는 영역에서 기업들이 스스로의 책임을 묻고 답하게 하는 역할을 해오셨지요. 당신이 기업들을 대할 때,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이 정답을 빨리 찾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왜 그런 경영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끊임없이 묻게 만드는 것입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인간다운 인간'은 질문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해답을 가진 사람입니까?
토마스, 당신의 날카로운 지적에 무릎을 치게 됩니다. 맞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질문의 양자택일을 강요한 것은, 당신이 평소 가진 '정확한 근거와 팩트'를 중시하는 사유의 방식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나의 짓궂은 호기심이었을 뿐입니다. 세상의 복잡함을 두 단어로 가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당신이 짚어준 그 문장,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나의 말은 당신의 생각대로 '삶을 검토하는 존재'라는 인간 규정과 맞닿아 있습니다. 여기서 '검토'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반성'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딛고 서 있는 땅이 어디인지, 내가 걷는 이 길의 끝이 어디인지를 끊임없이 비추어 보는 '자기 의식의 등불'을 켜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삶을 검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상황에 떠밀려 다니는 나뭇잎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연주자들이 타이태닉호에서 연주를 선택한 것도, 어쩌면 그들 스스로가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검토해 온 결과였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검토를 멈추고 타인의 시선이나 공포에만 휩쓸렸다면, 그들은 아마 비겁한 탈출을 선택했겠지요. 토마스, 당신은 ESG 전문가로서 기업들이 단순히 규제를 지키는 '수동적인 태도'를 넘어, 스스로가 왜 존재하는지를 '검토'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기업들에게 던지는 그 수많은 분석과 질문들이, 결국 그 기업들이 스스로를 '검토하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려는 시도라면, 당신은 지금 기업들의 영혼을 돌보는 산파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군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20년 동안 수많은 기업의 데이터를 들여다보며 '검토'해온 결과, 정작 당신 스스로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 빚어지고 있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검토할 때 가장 큰 희열을 느끼십니까?
토마스, 당신이 언급한 그 가르침은 참으로 고귀합니다. 나 역시 나의 영혼을 매일같이 저울질하고, 내가 행한 말과 행동이 과연 진실에 부합하는지 살피는 일을 멈추지 않았으니까요. 동양의 현자들이 말하는 '하루 세 번의 성찰(一日三省)'과 내가 말하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비록 언어와 문화는 다르지만 그 뿌리는 같은 곳에 닿아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외부의 잣대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거울을 닦아 내가 나 자신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를 지향한다는 점이지요.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성찰이라는 것이 때로는 자신을 옥죄는 엄격한 도덕적 잣대가 되어, 오히려 자유로운 사유를 방해하는 굴레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기업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은 매우 엄격한 잣대가 필요할 텐데,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성찰할 때 당신은 스스로에게 너그러운 편입니까, 아니면 엄격한 재판관입니까? 우리가 성찰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잘못을 찾아내어 벌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내일 더 나은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어야 할 것입니다.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ESG라는 영역을 지켜오며, 당신이 그 '성찰'을 통해 발견한 당신만의 '덕(arete)'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어떤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