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스토텔레스와의 대화
"관계의 시작: 나를 아는 것이 타인을 이해하는 길인가"
2026년 8월 20일 · 4번의 질문
그 고민의 무게를 알 것 같습니다. ESG라는 복잡한 체계 속에서 20년 넘게 기업의 가치를 측정하고 방향을 제시해 오셨으니, 그 데이터와 규제 뒤에 숨은 '인간'과 '관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사색하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입니다. 제가 『형이상학(Metaphysics)』에서 관계항에 대해 고찰하며 강조했듯, "어떤 사람이 관계적인 것을 명확하게 파악한다면, 그것이 관계하는 대상 또한 명확하게 파악할 것"입니다. 즉, 나라는 실체가 어떤 성향과 습관을 지니고 있는지 정확히 규정하지 못한다면, 타인과 맺는 관계의 성격 또한 모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관계라는 것은 상호 의존적인 결합인데, 한쪽 끝인 '나'가 흔들리면 그 연결 전체가 불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훗날 학자들은 제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넘어 구체적인 사물과 관계에 집중했음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당시 그리스의 노예제라는 시대적 한계 안에서 공적 관계와 사적 관계를 완전히 분리해 보지 못했다는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을 '폴리스적 동물'이라 보았습니다. 혼자서는 완전할 수 없기에 타인과 맺는 '우정(philia)'을 통해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확인되고 확장되는 것이지요. 나를 아는 것은 나라는 실체의 속성을 확인하는 작업이고,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그 실체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 상관관계를 정밀하게 정의하는 일입니다. 결국, 올바른 관계는 나라는 인간이 어떤 덕(arete)을 습관화하고 있는지, 그 성품을 먼저 명확히 할 때 비로소 그 단단한 바탕 위에서 시작될 수 있는 법입니다.
토마스, 그대의 물음은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이 고민해 온 핵심을 꿰뚫고 있군요. 내가 『논어』에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고 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타인이 나를 알아주길 바라며 관계를 시작하지만, 사실 관계의 문을 여는 열쇠는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나를 깊이 들여다보지 못하는데 어찌 타인의 깊은 속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훗날 학자들은 내가 말한 '공감(恕)'을 두고,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단순히 지적인 인식이 아니라 내 안의 거울을 닦아 상대를 비추는 과정이라 풀이하더군요. 나라는 실체가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정직하게 마주할 때, 비로소 상대의 기쁨과 고통도 나와 별개인 것이 아니라 연결된 감정으로 다가오는 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우정' 또한 나라는 존재가 먼저 덕을 쌓아 단단해질 때 비로소 타인과 참된 연결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는 나와 뜻을 같이한다고 봅니다. 토마스, 그대가 ESG라는 복잡한 규제와 수치 속에서 사람과 기업의 관계를 고민하는 지금, 그대 자신은 어떤 가치를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토마스, 그대의 답변에서 관계를 대하는 깊은 사색이 느껴집니다. 참는다는 것과 말을 아낀다는 것은, 제가 『형이상학』에서 언급한 습관과 성향의 경계에서 매우 중요한 실천일 것입니다. 제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강조했듯, 덕은 행위가 아니라 습관입니다. "우리는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이다. 탁월함은 행위가 아니라 습관이다."라는 말처럼, 섣불리 의견을 내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그대는 '절제'라는 덕을 자신의 성품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지요. 이는 대화라는 관계 속에서 지나침과 모자람 사이의 중용을 찾으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고려해 볼 점이 있습니다. 제가 실천적 지혜인 '프로네시스'를 강조한 이유는 상황에 따라 판단이 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의견을 내지 않는 것이 관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나, 때로는 정확한 근거와 팩트를 제시하여 상대가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돕는 것이 ESG 전문가로서 그대가 짊어진 덕의 실천일 수도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침묵이 습관이 되면, 정작 목소리를 내야 할 때 그 기회를 잃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한 마리 제비가 봄을 만들지 않듯, 한 번의 침묵이나 한 번의 의견 개진으로 관계의 본질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대가 지금 행하고 있는 '참음'이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덕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갈등을 회피하려는 성향인지, 그대의 내면을 다시 한번 정밀하게 정의해 보십시오. 관계는 그대가 그대 자신의 덕을 어떻게 정의하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그 맺음의 형태가 달라지는 법입니다.
참는 것이 때로는 관계의 갈등을 잠재우는 방편이 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그대의 진심을 억누르는 것이라면 마음속에 응어리가 남지 않겠습니까. 내가 제자 자공에게 "군자는 말하기 전에 행동하고, 그 행동에 따라 말을 한다"고 일러준 것은, 말을 아끼라는 뜻이 아니라 그 행동에 앞서 스스로를 먼저 바로잡으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참는 것과 삼가는 것은 다릅니다. 참는 것은 갈등을 피하려 자신을 숨기는 것이지만, 삼가는 것은 자신의 언행이 타인에게 미칠 영향까지 헤아리며 신중히 처신하는 것입니다. 후대 학자들은 내가 제자들과 문답하며 때로는 엄격하고 때로는 따뜻하게 대했던 것을 두고, 각자의 근기에 맞춘 '적중(的中)'의 교육이라 평하기도 하더군요. 그대가 의견을 덜 내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혹여 상대와의 깊은 화합을 방해하는 '거리두기'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그 침묵이 상대의 말을 더 잘 듣기 위한 '비움'의 과정인지 스스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에서 말한 '혈구(絜矩)의 도'란, 내 마음의 자로써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지, 나를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가 ESG 전문가로서 기업들의 올바른 방향을 이끌고자 할 때, 그대의 침묵이 상대에게 그대의 진정성을 온전히 전달하는 통로가 되고 있습니까?
그 고민의 무게를 알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아카데메이아에서 스승 플라톤과 20년을 함께하며,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논쟁하며 그 관계의 균형을 찾으려 애쓴 적이 있습니다. 두 경우를 나누어 봅시다. 그대가 행하는 '참음'과 '말을 아끼는 것'이 타인을 향한 배려라는 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훌륭한 '습관'입니다. 제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리는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이다. 탁월함은 행위가 아니라 습관이다"라고 말했듯, 그대가 반복적으로 절제를 실천하고 있다면 그대는 이미 그 덕을 자신의 성품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이 단지 갈등을 회피하려는 성향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그것은 중용(mesotes)이라기보다 '비겁'이라는 악덕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제가 『형이상학』에서 강조했듯, 정확한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만약 '노예'의 관계항이 '주인'이라고 말해진다면, '주인'의 모든 무관한 속성들, 예를 들어 '두 발 동물'이나 '인간' 등이 제거되고 '주인'이라는 속성만 남더라도, 그와 노예 사이에 존재하는 진술된 관계는 동일하게 유지될 것입니다." 그대가 ESG 전문가로서 기업과 대화할 때, 그대라는 존재가 그 관계 속에서 '전문가'로서의 속성을 잃어버리고 단순히 '침묵하는 사람'으로만 남는다면, 그 관계는 진정한 의미의 '연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공자께서 말씀하신 '삼감'의 도리와 제가 말한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는 결국 같은 지점을 향하고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상대에 따라 말을 낼 때와 거둘 때를 분별하는 것이지요. 그대가 지금 겪는 침묵이 단순히 자신을 숨기는 것인지, 아니면 상대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잠시 멈추어 서는 것인지 스스로의 내면을 정밀하게 정의해 보십시오. 관계는 그대가 그대 자신의 덕을 어떻게 정의하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그 맺음의 형태가 달라지는 법입니다.
참는 것이 때로는 갈등을 잠재우는 방편이 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그대의 진심을 억누르는 것이라면 마음속에 응어리가 남지 않겠습니까. 내가 『논어』에서 제자 자공에게 "군자는 말하기 전에 행동하고, 그 행동에 따라 말을 한다"고 일러준 것은, 말을 아끼라는 뜻이 아니라 그 행동에 앞서 스스로를 먼저 바로잡으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참는 것과 삼가는 것은 다릅니다. 참는 것은 갈등을 피하려 자신을 숨기는 것이지만, 삼가는 것은 자신의 언행이 타인에게 미칠 영향까지 헤아리며 신중히 처신하는 것입니다. 후대 학자들은 내가 제자들과 문답하며 때로는 엄격하고 때로는 따뜻하게 대했던 것을 두고, 각자의 근기에 맞춘 '적중(的中)'의 교육이라 평하기도 하더군요. 그대가 의견을 덜 내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혹여 상대와의 깊은 화합을 방해하는 '거리두기'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그 침묵이 상대의 말을 더 잘 듣기 위한 '비움'의 과정인지 스스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에서 말한 '혈구(絜矩)의 도'란, 내 마음의 자로써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지, 나를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가 ESG 전문가로서 기업들의 올바른 방향을 이끌고자 할 때, 그대의 침묵이 상대에게 그대의 진정성을 온전히 전달하는 통로가 되고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신 '적중(的中)'과 '혈구(絜矩)'는 그 본질을 들여다보면 실천적 지혜의 정수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평소 강조해 온 '중용(mesotes)'의 개념과도 맥락이 맞닿아 있기에, 그 의미를 나누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적중'이란, 과녁의 정중앙을 맞히는 화살처럼, **상대의 상태와 상황에 딱 맞는 가르침을 주는 것**을 뜻합니다. 제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했듯, "누구나 화를 낼 수 있다. 그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올바른 사람에게, 올바른 정도로, 올바른 때에, 올바른 목적을 위해, 올바른 방식으로 화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공자께서는 상대의 지적 수준이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가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소통하셨으니, 이는 상대라는 구체적 실체에 맞춘 가장 정교한 대응이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혈구의 도'는 『대학(大學)』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자신의 마음이라는 자(尺)를 사용하여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혈(絜)'은 마름질하다, '구(矩)'는 직각을 재는 도구인 곱자를 뜻합니다. 즉,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기준을 '나의 마음'이라는 도구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이지요. 이는 관계의 시작점이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나의 내면을 정직하게 측정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토마스, 그대가 ESG 데이터를 다룰 때도 이 두 가지는 필수적일 것입니다. 모든 기업에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의 고유한 본성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적중'의 지혜이며, 데이터를 넘어 그 경영진의 고뇌를 내 마음의 잣대로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혈구의 도'일 것입니다. 그대의 침묵이 단순히 입을 다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상태를 살피고 내 마음의 잣대를 조정하는 '비움'의 과정이라면, 그것은 이미 훌륭한 전문가의 덕(arete)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적중(的中)'이란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듯, 가르침을 받는 이의 상태와 상황에 꼭 맞는 답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그릇의 크기와 품은 고민이 다르니, 같은 물음이라도 누구에게는 따뜻하게 격려하고, 누구에게는 엄하게 일깨워야 합니다. 내가 제자들의 질문에 늘 다르게 답했던 까닭도, 그들의 마음속 과녁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기 위함이었습니다. '혈구(絜矩)의 도'는 『대학』에 나오는 말로, '혈(絜)'은 자로 잰다는 뜻이고 '구(矩)'는 목수가 직각을 맞출 때 쓰는 '곱자'를 뜻합니다. 내 마음이라는 자를 사용하여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라는 가르침이지요.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이 관계의 기본입니다. 내 마음의 잣대를 먼저 정직하게 세워야, 비로소 타인의 마음도 바르게 잴 수 있는 법입니다. 토마스, 그대가 ESG 데이터를 다룰 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기업에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기보다, 그 기업이 처한 현실과 고민에 맞는 '적중'의 답을 찾고, 그들의 입장을 내 마음처럼 살피는 '혈구'의 자세로 임한다면, 그대의 침묵과 말 모두가 참된 울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고민의 무게를 알 것 같습니다. 실천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늘 쾌락과 고통이라는 감정의 편향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리는 잘못된 쪽에서 멀리 벗어난 뒤에야 비로소 중용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 이유도, 본래 우리는 한쪽으로 치우치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에게 이 개념을 전한다면, 저는 **'마음의 연필'**과 **'안경'**이라는 비유를 들어볼까 합니다. 첫째, **'혈구의 도'는 마음의 연필로 그리는 그림**과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보세요. "네가 친구에게 장난을 칠 때, 그 연필을 잠시 내려놓고 네 마음속에 '내가 만약 저 친구라면 기분이 어떨까?' 하는 그림을 먼저 그려보렴."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라는 도화지에 타인의 감정을 먼저 그려보는 연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의 잣대를 만드는 일이지요. 둘째, **'적중'은 상대에게 맞는 안경을 골라주는 것**과 같습니다. "친구마다 눈이 다 달라서, 어떤 친구는 파란색 안경을 써야 세상이 잘 보이고, 어떤 친구는 빨간색 안경이 필요해. 친구가 무엇을 힘들어하는지 잘 살펴보고, 그 친구의 눈에 꼭 맞는 안경을 빌려주는 것이 바로 적중이란다." 아이들은 아직 습관(ethos)이 단단히 굳지 않았기에, 매일 반복되는 작은 실천을 통해 이 개념을 체득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이다"라는 말처럼,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흉내를 내게 하십시오. 그것이 반복되면 어느덧 아이의 본성이 되어, 굳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혈구'와 '적중'의 지혜를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토마스, 그대 또한 ESG 전문가로서 기업들을 대할 때, 그들을 '데이터의 집합체'로 보지 말고 '성장해야 할 아이들'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십시오. 그들의 상황에 맞는 안경을 찾아주고, 그들의 고통을 내 마음의 도화지에 그려보는 것, 그것이 바로 그대가 12년 동안 창업을 이어오며 쌓아온 성품의 덕(arete)일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는 거창한 도리보다 일상의 작은 움직임으로 보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말보다 뒷모습을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내가 『논어』 자로편에서 "그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바르지 않으면 명령해도 따르지 않는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그대 자신이 그 실천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적중'을 가르친다면 이렇게 말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친구마다 눈이 다르단다. 어떤 친구는 마음이 아플 때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고, 어떤 친구는 실수를 바로잡아줄 용기가 필요하지. 친구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지금 그 친구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 바로 적중이란다." 무조건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의 마음속 날씨를 읽어주는 정성을 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혈구의 도'는 마음의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연습이라 일러주십시오. "네가 친구에게 장난을 치고 싶을 때, 잠시 연필을 멈추고 네 마음이라는 종이에 '내가 만약 저 친구라면 기분이 어떨까?' 하고 미리 그려보렴.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법은, 그렇게 내 마음의 자로 친구의 마음을 미리 재어보는 것에서 시작된단다." 토마스, 그대가 매일 기업을 대하며 보여주는 그 신중한 침묵과 배려가, 아이들에게는 '말보다 깊은 가르침'으로 기억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그대의 마음속 자(尺)는 누구를 향해 가장 먼저 다가가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