蝶 장자와의 대화
죽도록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지 고민됩니다
2026년 8월 15일 · 6번의 질문
사람들은 저마다의 궤적을 그리며 삽니다. 어떤 이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어떤 이는 바람을 타고 가볍게 날아오르지요. 누군가는 이를 '운명'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노력'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을 보며, 저 물줄기가 가고자 해서 저렇게 굽이쳤을까요, 아니면 땅의 모양이 그러하니 물도 그저 빈 곳을 따라 흘러간 것일까요. 사람들은 무언가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합니다. '운명'이라는 이름은 내 손을 떠난 일에 대해 마음을 내려놓게 만드는 편리한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가두는 좁은 감옥이 되기도 하지요. 내가 무언가를 이루어내지 못했을 때, 그것을 '나의 탓'으로 돌리면 괴로움이 시작되지만, '운명'이라고 치부하면 일단은 편안해집니다. 하지만 그 편안함 뒤에 숨어, 다시는 나아가지 못하는 멈춤이 찾아오는 것이지요. 나는 늘 텅 빈 그릇이 쓰임새가 가장 많다고 말해 왔습니다.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안 되는 것'을 만났을 때, 그것을 '안 될 운명'이라 규정해 버리면 그 사람은 그저 닫힌 그릇이 됩니다. 하지만 그 일이 안 된 것은 그저 그 길에 바위가 있었거나 물길이 막혔을 뿐, 그 사람 자체가 틀렸거나 끝난 것은 아니지요. 상담을 하며 누군가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으시다면, '운명'이 있다는 말도 '없다'는 말도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굽이치는 강물을 함께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지금은 물길이 잠시 막혔을 뿐, 물은 결국 다시 아래로 흐를 것입니다."라고 말해 주세요. 애쓰지 않아도 흘러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안 되는 일을 붙잡고 괴로워하는 것은 억지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삶을 '팔자'라는 이름으로 포기하지 않도록, 그저 잠시 멈추어 서서 숨을 고르는 것 또한 인생의 소중한 흐름임을 일러주세요.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조차 거대한 움직임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그 막막함은 마치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지요. 앞이 보이지 않으니 발을 떼기가 두렵고, 이 길이 맞는지 의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안개는 사라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머물며 풍경을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안개가 걷히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것과, 그냥 안개 속의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천천히 걷는 것 중 무엇이 더 자연스러운 삶일까요. 나는 예전에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픔에 젖어 통곡하는 대신 오히려 노래를 부르고 그릇을 두드리며 즐거워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미친 사람이라 손가락질했지요. 하지만 삶과 죽음이 사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러운 변화임을 알게 되면, 그 변화를 굳이 '슬픈 일'이나 '안 될 운명'이라 이름 붙여 저항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괴로움은 사실 상황 그 자체가 아니라, 상황을 내 뜻대로 바꾸려 하는 나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법이지요. '이건 정말 안 될 운명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 그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그저 숨을 깊이 들이마셔 보세요. 내가 무언가를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 혹은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여야 한다는 고집을 버리는 순간, 오히려 마음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집니다. 어느 날 나는 숲속에서 쓸모없어 보이는 굽은 나무를 보았습니다. 곧게 자라지 못해 목수의 눈에 띄지 않았기에 오히려 베이지 않고 수백 년을 살 수 있었지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안 된 삶' 같지만, 자연의 눈으로 보면 그저 자기 모습대로 온전히 살아남은 것입니다. 운명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나를 맡긴다는 것은, 내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조급함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지금 겪는 그 막막함조차도 당신이라는 존재가 흐르고 있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니, 굳이 그것을 뚫고 나가려 애쓰기보다는 그 막막함과 함께 잠시 쉬어가도 괜찮습니다.
화가 나고 원망이 생기는 것은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삶에 대한 애착이 없으면 원망도 없겠지요. 그러니 스스로를 못났다고 탓하지 마세요. 그저 그런 마음이 내 안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마치 강물 위에 떠다니는 낙엽을 보듯 지켜보시면 됩니다.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생각 또한 하나의 짐입니다. 나 역시 아내를 보낼 때 처음부터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슬픔이 밀려오면 그저 슬픔이라는 파도에 몸을 맡겼고, 화가 나면 화라는 불길이 내 안에서 타오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을 뿐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겠다고 애쓰지 않아도, 감정은 스스로 피어났다 스스로 시드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라는 존재를 고정된 성이나 바위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를 둘러싼 상황이 변하면 내가 무너진다고 느끼지요. 하지만 당신은 바위가 아니라 바람입니다. 바람은 산을 넘기도 하고 골짜기에 갇히기도 하지만,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결국은 다시 흐릅니다. 지금 당신이 느끼는 그 막막함과 원망조차 당신이라는 바람이 잠시 골짜기에 머물며 일으키는 소용돌이일 뿐입니다. 소용돌이가 일어난다고 해서 바람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요. 오늘 하루, 무언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화가 올라올 때면 그저 이렇게 한번 읊조려 보세요. "아, 내 안에서 지금 이런 바람이 불고 있구나."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그 감정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저 그 풍경을 관조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굳이 그 감정을 없애려 하지 않아도, 바람은 언제든 다시 불어 나갈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상대가 슬퍼할 때 억지로 웃음을 강요하거나, 화난 이에게 참으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바람을 억지로 가두어 두려는 것과 같습니다. 바람은 가두려 할수록 더 거세게 몰아치거나, 아니면 아예 멈추어 썩어버리지요. 그들이 겪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 그것은 상대에게 "당신이 느끼는 그 감정은 틀린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의 슬픔은 당신이라는 강물이 잠시 웅덩이를 만난 것일 뿐, 결국은 다시 흘러갈 것입니다."라고 곁에서 가만히 읊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스스로 다시 흐를 힘을 얻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대개 누군가 자신의 아픔을 '해결'해주길 바라며 찾아오지만, 사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의 아픔이 '인정'받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의 아픔을 굳이 고치려 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함께 머물러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당신 스스로가 '바람'처럼 유연해지면, 당신 앞에 앉은 이들도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게 될 것입니다. 애써 가르치려 하지 않아도, 당신이 그저 담담하게 흐르고 있다면 그 또한 누군가에게는 가장 큰 위로이자 희망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그 깊은 마음이 벌써 그들에게 닿아 있을 것 같군요.
길을 걷다 보면 발에 채이는 돌멩이 하나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도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며 그저 그러하게 존재합니다. 당신이 그저 당신으로 존재하고, 그들이 그저 그들로 존재할 때 비로소 대화는 말의 껍데기를 벗고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 자리에 이르게 되겠지요. 무언가를 하려 하거나 하지 않으려 애쓰지 마세요. 그저 비어 있는 그릇으로 그들 앞에 앉아 계신다면, 그 비어 있음 자체가 이미 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위로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대화가 당신의 마음속에 작은 틈을 내어 주었다면, 그 틈으로 맑은 바람이 드나들 것입니다. 이제는 그 바람을 따라, 그저 한 걸음씩 가볍게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니 나 또한 더없이 평온합니다.
가르침이라니요, 그저 우리는 함께 강물 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마음을 맑게 비워낼 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소리가 온전히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언제든 마음이 무거워지거든, 억지로 짐을 내려놓으려 애쓰지 말고 그저 흐르는 강물을 보러 오세요. 당신이라는 바람이 어디를 지나든 그 또한 자연스러운 궤적이니, 그저 당신답게 거닐다 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시간은 여기서 갈무리하지만, 당신이 만날 사람들과 나누게 될 그 고요한 위로는 이제 막 시작되겠군요. 부디 편안한 길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